[스크랩] 김성용 신부님의 5.18 일기

2013. 6. 10. 10:34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 일기는 광주시 남동천주교회의 김성용 신부가 광주사태의 진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하기 위해 쓴 것이다.

 김신부는 이 일기 등을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2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1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소위 5.18 사건의 발단(18일)

 



80만 시민이 조용히 잠든 아침 5시 30분, 예수 승천 대축제의 최초의 미사를 집전하기 위하여 눈을 떴다.

미사를 끝내고 환갑을 맞이한 신도의 어머니를 축복하기 위하여 11시 30분 곡성으로 향했으나,

노동청에서 도청에 이르는 도로가 차단되어 있었다.

경찰인지 군인인지 곤봉을 손에 든 모습은 마치 로마의 군인을 연상케 했다.

오후 5시 같은 장소에 돌아왔을 때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뇌를 스쳤다.

 

아침보다 배나 늘어난 경찰관과 군인들이 엄중히 경계하고 있었으며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저녁때 마침 박찬희 선수의 타이틀 방어전이 열리고 있는 도중,

 계엄사령부의 통행금지시간 연장에 관한 발표가 자막에 비쳤다.

 최초는 오후 8시부터, 그러다 얼마 안 있다가 다시 밤 9시부터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공수 특전대의 살상만행(19일)

 

오후 1시 30분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에 있는 북동에 가기 위해서 택시를 잡았다.

 거리의 사람들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이미 어제 낮(12시경)에 공수부대가 시내에 투입되어 가공할 살상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철제의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선혈을 흘리며 넘어진 사람을 군화발로 차고 밟았다는 것이다.

 여학생, 남학생의 차별없이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발로 차고,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 한다.

 담을 넘어서 민가에 도망가는 젊은이를 쫓아가서 그러한 만행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이유없이 포승지어서 연행했다.


아, 이것이 대한의 자랑스런 국군인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오후 4시경 가톨릭센터로부터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올랐다.

 분노한 사람들이 차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했다.

나는 동료 신부 3인, 그리고 농민회 회장과 같이 가톨릭센터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사람이 소방서 앞 십자로를 메우고 있었다.

 우리들이 거기에 이르렀을 때 시민들이 욕설하며 서서히 도망가기 시작했다.

 장갑차를 선두로 하여 착검한 공수부대가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 이것이 대한민국 군인들인가?

 도로에 면한 양측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시민들을 향하여 욕설을 하며 죽인다고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

 


지휘관의 명령으로 5,6명의 공수부대 병사가 살기찬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긴장한 우리 일행의 앞뒤를 지난 공수부대원은 태권도식으로 굳게 내려진 빌딩의 셔터를 발로 차고

총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분노에 떨고 있었다.

M16 소총이 내 손에 있었더라면, 나는 전원을 사살했을 것이다. 전율할 충동을 느꼈다.

국민의 피땀이 묻은 방위세로 무장한 군대,

 

외적의 침략을 막으라고 주어진 총검을 이 나라의 주인인 시민들에게 돌리다니....

 

이런 군대는 필요없다. 주인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 군인들을 미치게 했는가?

 국민을 살상하라고 명령한 원흉은 누구인가?



아침부터 데모가 시작되었다.

 나를 도와주는 누나의 딸, 국민학교 1년생인 마리아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아이들이 말하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몽땅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말해요.

 그래서 선생님도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어요...."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이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들이 붉은 인민군으로 보였다는 것일까?

분노한 시민들은 도처에서 데모를 계속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일부 병력이 계엄군과 교체한 것같이 보였다.

 시민은 10인 정도만 모여도 해산당했다.

 

오후 5시경 도로건설중인 한국은행 앞 십자로에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슬로건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엄해제, 계엄해제, 전두환은 물러나라! 민주인사 석방하라! 구속자 석방하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열렬히 불려졌으며, 다시 각종 슬로건이 격렬히 외쳐졌다.

 

또 모여든 군중 때문에 도로는 가득 찼으며, 중고교생이 다수 참가하였고, 국민학교 5, 6년생도 보였다.

군중은 드디어 ''와, 와'' 소리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계엄군은 페퍼포그를 쏘면서 신속히 대응했다.

 한 소학생이 돌을 쥐고 달려와 계엄군을 향하여 던지고는 도망갔다. 너무나 가련하게 보였다.

 



피로 물들여진 석가탄생일(21일)

 



시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청 앞을 향하고 있었으며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도청으로 향했다.  1백미터 전방에 있는 전선대 같은 나무가 타다 남아 있었으며

차가 왕래을 못 하게 장애물이 세워져 있었다.

충장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숨이 가빠졌으며 다음에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최루가스 때문일 것이다.

 눈물을 닦으며 남동에 닿았다. 신부 4, 5명이 모여 있었다.

 안면 있는 신도들도 모여서 책망을 한다.

 

이런 곤란한 시기에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민중의 지도자로서 신부들이 선두에 서야 하지 않느냐,

 한시라도 빨리 대주교님을 모시고 플래카드를 선두로 수습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

 

부끄러운 일이다. 숨을 곳이 있으면 숨고 싶다.

 그러나 이 중대사태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무나 무기력하고 나약한 자신을 돌아본다.

오후 2시경이 되어서 겨우 모인 신부는 8명이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의견을 교환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총성이 격렬히 하늘을 울린다. 헬리콥터로부터도 사격해 온다.

 아래에서도 헬리콥터를 향하여 총을 쏘는 것 같다.

5분이나 지났을까, 여신도 한 사람이 새파랗게 질려서 달려들어왔다.

 

조금 아까 학생 하나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내장이 튀어나와 피투성이가 되어서

적십자병원에 운반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있다 또 남신도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무차별사격으로 총탄에 맞은 학생 10명을 적십자병원에서 확인했다는 것이다.

20분 정도 지나서 박신부가 들어왔다.

 

가톨릭센터에 가려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도중 개인병원에 운반되는 3명의 학생을 보았는바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다.


피로 물들인 석가탄생일날,

 살생을 단죄한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무자비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자위권마저 포기하고 발포 안했다는 계엄사령부의 허위보도는 한 외국기자가 말하는 것같이

 ''한국''은 몰라도 광주의 80만 시민은 알고 있다.

 


휘날리는 태극기(22일)

 

 
아침부터 태극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여러 차 위는 무장한 학생과 시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석가탄생일인 21일 정오경에는 화순 방면으로부터 무장한 시민, 학생들이

 태극기와 총을 흔들며 시내에 들어와 연도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이들을 맞이했다.



한편 총검으로 무참히도 살해당한 운전수의 뉴스를 들은 택시운전수들은 공설운동장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헤드라이트를 켜고 클랙슨을 울리면서 빗발같이 돌진해 갔다.

 3시경에는 아세아공장에서 달려온 장갑차 한 대가 계엄군 2,3명을 밀어 제치고

본격적인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공포에 빠진 계엄군은 21일 저녁 7시 30분경 전투경찰대를 해산시키고

8시 5분경 닥치는 대로 발포하면서 시외로 철수 했다.

 

마침내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학생과 시민군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완전히 장악한 시가지 전역을 행진하면서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도 시민 속에서 손을 흔들고 힘차게 힘차게 박수를 계속했다.

아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전시민은 자발적으로 밥을 지어 운반하고 음료수를 제공했다.

 

자유와 민권을 위하여 청춘을 불태우고 싸우는 자랑스러운 용사들,

 이 사람들이 어찌 폭도이며 불순분자라고 할 수 있는가. 봉기한 애국투사가 아닌가.

휘날리는 태극기의 파도여!




분노한 80만(23일)

 


어제 아침 10시경이었다. 윤공희 대주교가 남동에 오셨다. 도청에서 오시는 길이라 했다.

 광주에 올 예정이었던 국무총리서리를 만날 목적으로 왔으나 상황이 바뀌어졌다 한다.

 사태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갑자기 어용목사와 교수, 그리고 장모라는 정치가가 달려들어

 긴급히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윤대주교를 고문으로 맞이하고 주로 학생들이 제안한 7개항목을 논의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정오에 재진입하는 것을 막고 피바다가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윤대주교는 처음부터 사령관에 전화로 강경히 항의하고

군의 만행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대주교는 수습위원회에 협력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도청에서 나오신 것이다.

 혹시 국무총리와 만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숙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3시경 드디어 그가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분노한 80만 광주시민이 무서웠던지 계엄사령부의 일방적인 보고만 듣고

부도수표를 던지고 도망가듯이 서울로 돌아갔다.

밤 9시 20분 소위 국무총리서리의 특별담화문이 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아니 그야말로 분노가 머리 끝까지 뻗치는 이야기였다.

 


수습대책위에 대한 불신(24일)


무기회수에 노력하고 있는 수습대책위원회를 돕기 위하여 23일 오전중 도청에 들렸다.

 그러나 장모 목사와 사업가 장모 씨가 전화통을 잡고 당국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히 받았다.

 

학생대표와 시민대표가 연달아 들어와서 무기만 회수하면 무엇이 되는가 빨리 수습해 달라고 호소했다.

22일 이들 수습위원회가 계엄사령부 당국과 구두로 약속한 8개 항목의 내용은 무기를 회수하는 대신,

 군은 진주하지 않고, 연행자들을 선별 석방하고,

 사북사태와 같은 사후보복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이이었다 한다.

24일 오전 10시경 도청 청사 2층에 있는 수습대책위 회의실(부지사실)에 들어가자,

 

이미 각종 총기 3천5백정, 수류탄 1천기가 회수되어 있었다.

그리고 22일의 8항목 합의사항도 문답식으로 인쇄한 삐라를 준비하여 일부 시민에게 배부하는중이었다.

 

얼마 후 30명 정도의 각계 수습위원이 모여 임시위원장 이종기씨가 시민에게 말하기로 하고

전원 도청 앞 광장에 나갔다. 광장에는 군중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집합했으며

시민궐기대회를 기다리면서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있다 임시위원장이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며,

 나는 수습대책위원회 사람들과 같이 분수대 아래 최전열에 앉아서 듣고 있었다.

 

한두 번 박수가 있었을 뿐 "집어치워라"하는 불신의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실패한 것이다.

 그는 시민에 의하여 신뢰를 받지 못한 것이다.

"집어치워라. 간단히 말해라. 끌어내려라. 죽여버려라." 시민의 불신은 무서웠다.

 

나의 기억에는 조신부가 "총이 있으면 살상만행을 마음대로 한 공수부대를

한 사람 남기지 않고 사살하고 싶은 심정이다"

 

라고 말했을 때 큰 박수가 일어난 것 뿐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저렇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수습대책위원회는 끝이다.

이렇게 판단한 나는 도청내에 들어갔다.

 

그리고 의인의 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수습하는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기자들과 민주인사, 그리고 학생대표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회의의 진전은 없었다.

12시가 지나서 일단 집에 돌아왔다.

장직은 신부와 같이 간단히 식사를 하고 신부들과 2시에 도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피의 대가를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실망했다.

 계엄사령부에 수시 연락하며 지시를 받아 총기회수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어용인사들과는

더 이상 같이 일할 수가 없었다.

 

민주 인사들이 퇴장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뢰받지 못한 것은 수습대책위원회 뿐이었을까?

 

선량한 민중은 수십 년간 독재자들의 기만과 억압을 감수해 왔으며 우롱당해 오지 않았는가.

 학생은 교수를 신임하지 않았으며 민중은 관료를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전국민이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전국민이 정권을 신뢰하지 않고 정부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하여도 신용하지 않는 무서운 불신시대가 아닌가.

 

누가 이런 상태를 만들었는가. 회한과 슬픔이 가슴을 찌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습해야(25일)

 


오늘은 성령강림의 대축일이다. 자비있는 성령의 은혜로 새 인간이 된 날이다.

그러나 오직 광주지역은 공포와 피비린내나는 혼란의 흙탕 속을 방황하고 있다.

윤공희 대주교로부터의 메시지를 읽었다. 10시 미사시에도 메시지를 읽어서 들려주었다.

기뻐 축하해야 할 기간이었던 지난 1주간,

오직 광주시민만이 피를 흘리는 불행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됐으나,

 피의 대가는 기필코 갚아야 할 것이다. 역사에 유례가 없는 비극이기는 하지만

 현명히 수습에 노력, 사랑을 갖고 증오와 불의를 이기자고 호소하고

 이미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을 위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나는 대략 다음과 같이 강론을 했다.



1. 지금 우리는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며,

개나 도야지와 같이 입을 먹이 그릇에 처박아 먹어야 하며,

 짐승과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 폭력과 살인을 일상 밥먹기처럼 하는 유신잔당이

 우리를 짐승같이 취급, 때리고 개를 죽이듯이 끌고 가고 찌르고 쏘았기 때문이다.



2. 두 다리로 걷고 인간다웁게 살려고 하면 생명을 걸고 민주화투쟁에 몸을 던져야 한다.

 과거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들은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3. 부산, 마산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은 유신괴수의 죽음으로 보상되었다.

 그리고 유신괴수도 김재규 일당의 죽음으로 보상된 이때에

자유와 인격을 위하여 죽어간 많은 시민의 피도 보상되어야 한다.



4. 이제야말로 우리는 결단의 때를 맞이하였다.

 비굴해져서 짐승같이 천한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다운 민주시민으로서 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인가.



오후 2시 변호사, 교수, 민주시민, 청년, 신교측 인사, 신부들이 모였다.

 2시간 동안 진지한 토의를 거듭한 끝에 ''수습하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전원 도청으로 향했다.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4시가 지나서 UPI기자의 전화를 받으려고 도청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흥분된 대화를 나눈 후 수습위원을 재정비하고 수속 절차를 밟고 협의를 시작했다.

 

피의 대가를 요구하자, 그래야 비로소 수습할 수 있다하고 드디어 나의 제안이 만장일치로 결의되었다.

최대통령이 방송망을 통하여 전 국민에게 다음과 같이 사죄할 것을 요구한다.

1. 금번 사태는 정부의 과오로써 가져온 것을 인정하고,

2. 사죄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

3. 여하한 보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4. 모든 피해는 국가가 보상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진실을 말하고 사죄한다면

자유를 사랑하는 광주시민의 누구 하나 용서 안 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진실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실 속에서만이 불신이 제거되며,

 

민족적 화해와 진실한 국민총화가 이루어지며 국가안보가 보장될 것이다.

6시경이라고 기억한다. 학생회장이 피곤한 모습으로 들어와 무엇인가 호소한다.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TNT를 어른들이 지켜달라는 것이다.

 3일간 한잠 못 자고 지켜왔으나, 이제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지키자. 목사와 신부에게 총을 주면 우리들이 지키겠다고 제안했다.

 결국 목사와 신부가 신뢰할 수 있는 청년들을 데리고 와서 지키기로 했다.

 

비가 계속 내리는 밤길을 걸어서 본당으로 돌아왔다.

무기는 군대가 갖고 외적과 싸우는 것이니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자유와 민주화를 위하여 죽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공산군이 오면 대한민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다고 서약한다.

아, 이 애국청년들을 누가 폭도라고 쫓아버리는가.

수습하자. 무엇이 어떻든 간에 수습해야만 한다.



죽음의 행진(26일)

 


새벽 5시 30분경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돌연 초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전차가 진입해 온다. 순간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총을 가진 시민군, 학생 전원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으며 혼란을 극에 달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전원 자폭하자. 상황실에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하여 차가 출동하였으며,

 여기저기 다이알을 돌리면서 주변의 동태를 물었다.

 

의자에서 자고 있던 부지사가 벌떡 일어나 확인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또 속은 것이다.

흥분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용기를 내자. 주여, 구해주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

철야한 수습대책위원은 17명이었다. 전차가 진을 치고 있는 데로 나갑시다.

 

지금 이 상태로는 우리들은 불을 뿜을지 모르는 전차 앞에 나가도 죽을 것이며 여기 있어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원 나갑시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여기 남아서 여기를 지켜주십시오.

전원이 찬동하여 일어났다.

4킬로미터 정도 행진했을 것이다.

 

농촌진흥원 앞에 보도를 차단하고 서 있는 전차가 마치 괴물과 같은 포문을 길게 뻗치고 있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따라오기 시작한 시민이 어언간 수백 명에 달했다.

 드디어 2중으로 쳐진 바리케이드까지 갔다.

 소령 1명이 굳은 표정으로 맞이하면서 부사령관이 곧 올 것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아침 9시경이다. 시민은 점점 증가했다.

 양측 인도에서 착검한 계엄군이 실탄을 장전하고 시민을 경계하고 있으며,

양측 빌딩 2층과 옥상에서도 군인들이 보였다.

 

얼마 있으니 좌측의 인도에서 군인들이 기관총을 내걸고 시민을 향하여 발포태세를 취한다.

 

상상도 못할 광경이다. 외국인 기자 앞에서 부끄럽다.

이것이 대한민국 군대인가, 괴뢰군인가?

외국인 기자가 우리들의 치부를 필름에 수록하기 위하여 전차 사이를 내왕해도 말 한마디 못 하는 자들이

 

국민에 대해서는 뽐내고 총을 대는 모습이 원망스럽다. 검은 세단차에 탄 장군이 나타났다.

두개의 별이 빛난다.

 

부관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장군은 부끄러운지 계엄사령부에 가서 이야기하자 한다.

 



우리들은 군인이다(26일 오전 10시-오후 2시 30분)

 

 


부사령관 김소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학생대표를 포함 11인이 상무대로 갔다.

약속을 위반하고 전차를 이동케한 데 대한 항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결의를 말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신부가 여기에 왔는지, 진심으로 이 이상 귀중한 피를 흘리지 않고 수습될 것을 요청,

 

이 일은 전광주시민뿐 아니라 국가적인 일이니 이렇게 신부도 수습위에 참가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말은 통하지 않았다.

교묘히 나의 말을 왜곡하고 유도하면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나는 군인이다. 정치문제는 모른다.

 

그러므로 대화를 하자면 1. 무기회수, 2. 군에 반납, 3. 그렇게 하면 경찰로 하여금 차안을 회복케 하겠다.

 

일방적인 각본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개념이 달랐다.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습회의는 장장 4시간 30분안 계속되었다.

군인들과 이 이상 이야기해도 별 수가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그들은 명령대로 행동하는 자들이다. 무력으로 작전을 수행할 뿐이다.

 밤 12시까지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최후통첩이다.

 그래서 무조건 수습을 위하여 5개 항목의 요구를 제시했다 .



1. 시간이 필요하다. 노력해서 수습한 것을 군이 약속을 깨었으니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며칠을 참고 후퇴까지 한 군의 사기에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군은 항상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타당한 말이다. 국군은 언제나 이겨야 한다.

 그러나 적군에 이겨야 하는 것이지 나라의 주인인 국민, 80만 광주시민에게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시 묻지 못 했다.

 



2. 약속을 위반하여 전차를 행동케 한 데 대한 이유를 분명히 하고 사죄하라.

 이미 방송을 통하여 시민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3. 군은 절대로 광주시내에 진입해서는 안 된다.

 오늘 아침에도 느낀 일이나 총구를 국민에 돌리는 군대를 어떻게 대한민국 군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욱이 돌연 무자비한 살상행위를 한 군을 광주시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신부이며 직접 살상행위를 목격하지는 않았으나 김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 혐오감을 느꼈다.

 하물며 직접 살상을 목격한 시민, 가족을 잃은 시민, 원한과 분노에 찬 시민이

어떻게 군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들 말로는 군인 중에도 살상당한 많은 전우의 모습을 본 젊은 군인들이 분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애국, 애족에 관하여 교육이 잘되어 있어서 참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민주학생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시위하고 있는 것을 총검으로 무차별 살상하고

전시민의 의거로 쫓기고, 지금 와서 피차 매한가지라니.



4. 경찰에게 치안을 담당시켜라.

 무기가 회수되어 군에 반납되면 그렇게 하겠다는 조건을 낸다.



5. 보도로 화해를 호소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시민을 자극하지 말라.

 메모를 하 여 전령에게 주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한다.

지금 와서 거의 불가능케 된 수습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시민들에게 돌아가서 호소해 보아야지.

 



비극의 도시 광주에서 탈출(26일)

 

지프차를 타고 공업단지 입구까지 와서 내렸다.

시외도로로 통할 수 있도록 파헤쳐졌던 길이 정리되어 있었다.

 

시민이 주의깊게 왕래하고 있었으며 택시까지 눈에 띈다.

 

시민이 야채를 구입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었으나

분명히 군의 작전을 위하여 취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4시에 겨우 가톨릭센터에 도착했다. 많은 시민이 모여 있었으며 또 모이고 있었다.

시민 속을 헤치고 도청에 갔다.

 

총을 갖고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10대의 젊은이가 신부인 줄 알고 통과시켜 주었다.

 

부지사실에는 외국인 기자까지 합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끄집어내야 하느냐?

 

우선 시간을 끌기 위하여 수습대책위원 전원이 모인 다음에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보고서와 호소문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YMCA에서 젊은이가 와서 곧 서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언이 도착했다.

 

잠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를 뜨면 도망하는 것이 아닌가? 시민이 어떻게 생각할까?

 비겁한 신부,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교회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을 알리는 것도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탈출해야 한다.

 

옆에 앉은 조신부에게 조언을 구했다.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고 일어섰다.

도중 도지사가 시체안치소에 가는 것이 보였다. 원한과 분노가 가슴 속에서 동시에 끓어올랐다.

 

80만 광주시민과 생사를 같이해야 할 도지사가 가족과 같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지금 와서야 나타나다니 철면피가 아닌가?

 

그는 그대로의 이유는 있었겠으나.... 시민의 앞에서 규탄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보다 큰 사명을 다해야 한다. 왜곡된 실상, 공수단의 만행과 계엄군의 무차별 사살을 세상에 폭로해야 한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받은 신부가 아니냐,

 그래야 비로소 80만 광주시민의 피의 대가를 찾을 수가 있다.

 

무장폭도, 불순분자라는 오명을 씻고 자랑스러운 민주시민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서울에 가자. 추기경에게 알려야 한다.

주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도움, 그리고 형제들의 따뜻한 헌신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다음날(27일) 밤 10시경 무사히 명동에 도착했다.

일부러 ''탈출''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죄를 범하고 도망한 것이 아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능력과 섭리에 의해서 굴욕적인 애굽에서 탈출한 것과 같은 의미이고 싶다.

 

 


피의 대가는 어디에

피의 맛을 본 정권은 드디어 폭력으로 또다시 짓밟았다.

 

계엄당국은 17인이 죽었다고 보도하고 정부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진압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27일 오전 2시경 행동을 개시한 계엄군은 6시경에 도청을 접수했다고 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을 것인가.

 

하느님만이 아는 사망자의 수를 발표했으니 누가 신용할 것인가?

 국민의 피를 빤 정권은 책임을 통감하고 응분의 결단을 하여야 한다.

 성경의 말씀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고하였다.

 

속죄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주여!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옵소서.

 

아무 죄도 없이 피를 흘리고서도

 폭도, 난동분자로 몰리고 불순분자의 유언비어에 현혹된 어리석은 자로 낙인이 찍혀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광주시민이 흘린 피를 누가 보상할 것입니까?

 어디서 보상을 받습니까?

 아, 피의 대가는 어디에....

 


 

KBS스페셜/ 길위의 사제들 중 일부화면

출처 : 함께 있음
글쓴이 : 김레지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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