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국무총리 회고스토리3

2009. 5. 26. 10:32교훈이 되는 이야기

[미니자서전 7] 노란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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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8월 15일.
나는 광복절에 특사로 석방되었다. 2년 6개월만의 석방이었다. 나를 고문하고 핍박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했던 민주화는 아직 이 땅에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신군부가 더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의 삶을 옭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방의 기쁨과 싸움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허탈감 보다 새롭게 싸워야할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출옥 당시 나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일단 몸을 추슬러야 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감옥에 있는 동안 더욱 공고해지고 확연해졌다. 그 때부터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난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암울했던 80년 초의 시대적 부조리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아직 감옥에 남아 있는 남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난 남편의  옥바라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도소 경험 이후 내 생각은 바뀌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토록 비인간적인 감옥생활을 10년 이상 강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남편의 석방운동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은 정치범이었고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여전히 정치범에 대해 가혹할 만치 혹독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편의 석방은 비단 나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권과 관련된 시대의 양심을 되찾는 일이었다. 

나는 시인 김지하씨의 도움으로 가톨릭의 지학순 주교를 소개받았다. 나와 남편이 살아 온 신산한 삶을 고해하듯 말씀드렸다. 남편과 같은 청년을 10년 이상 구속하는 것은 인권 유린이라고 판단한 지학순 주교는 흔쾌히 남편의 석방을 도와주겠노라 약속했다. 지학순 주교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리더 중 한 사람이었으며 한국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2월 20일이 될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난 4개월간의 석방운동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돌아 올 성탄절과 세밑의 축제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모두가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나는 단식을 하기로 했다. 남편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온기 하나 없는 차디 찬 감방에 있을 남편을 생각하자니 따뜻한 방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웠다. 물만 마시고 일주일을 견디기로 했다. 하지만 몸이 너무 쇠약해진 까닭에 단식 닷새째 되는 날 난 자리에서 일어 날 수조차 없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탈진 상태였다.  

1981년 12월 24일 저녁, 단식으로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있을 때 중앙정보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성준씨가 25일 석방되니 가족이 교도소까지 마중을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온다. 나의 키다리 아저씨, 나의 동지이자 내 사랑의 총합인 박성준, 내 남편이 돌아온다. 빨간 넥타이를 한 채 쑥스럽게 미소 짓던 첫 데이트 때의 남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단식 탓에 솟아오르는 기쁨을 표현할 기운이 없어 누운 채 조용히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 일인가! 13년 6개월만의 만남이다. 준을 맞으러 가족과 함께 집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걸음에 달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난 미처 집을 나서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남편이 석방되던 날, 나는 그를 맞으러 가지 못했다.

1981년 12월 25일 오후 2시, 남편은 13년의 기나긴 형기를 마감하고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스물일곱 청년의 모습으로 나를 떠났던 남편은 이제 마흔 한 살의 중년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역시 어여쁜 새색시에서 중년을 바라보는 서른일곱의 아낙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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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자서전 8] 쏘지마! 쏘지마!!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 87년 2월.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드디어 전국 21개 민주여성단체가 연합하여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했다. 여성연합은 이후 진보적 여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민주화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마지막은 처절하고도 뜨거웠다.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개헌을 통해 국민의 권리인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민중의 염원이 솟아오르는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당한 물고문 치사 사건은 민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박종철의 죽음은 분노한 민중에 분노의 불을 지폈다. 각계에서 연일 성명서가 발표되고 학생, 노동자, 여성, 교수, 교사, 변호사, 사무직 노동자, 종교인, 일반시민까지 고문 폭력정권 타도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 해 6월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대규모 시위가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남편과 나도 두 살짜리 아들 길이를 어머니에게 맡겨 둔 채 거의 매일 시위에 참여했다. 남편은 자신이 목회자로 있던 문중교회 멤버와 시위에 참가했으며 나는 여성단체 회원들과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당시 여성단체 회원들은 머리에 삼베수건을 쓰고 거리를 행진했다. 삼베는  죽음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죽음과 정권의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박종철군에 대한 애도의 상징이었다. 이후 삼베수건은 구속자 어머니들의 시위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장례식, 일본군 위안부 시위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거리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의 함성과 이를 진압하려 폭력정권이 쏘아대는 최루탄 그리고 이에 맞선 학생들의 돌과 화염병과 투척으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여성연합은 이러한 폭력적 시위 문화를 평화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기로 결의했다. 그 일환으로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그 날의 시위를 여성연합이 주도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87년 6월 18일, 파란 초여름의 하늘 위로 울려 퍼지던 그 날의 함성을 생각하며 아직도 콧날이 시큰거린다.

6월 18일. 여성연합회회원들은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수 백 개의 빨간 카네이션을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섯다. 우리들 뒤로는 수십 만 명의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수 십 만의 목소리가 함성으로 변해 종로 한 복판을 쩌렁거리며 울렸다. 좌우의 빌딩에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창을 열어 우리의 구호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종로 네거리로 수 천 명의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진입해 오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 난 전경들의 위압에 눌려 시위대는 잠시 술렁거렸다. 눈 감짝할 새 우리 여성연합회 회원들 앞으로 수 천명의 전경들이 열을 맞추어 한발자국씩 다가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우리 여성들은 떨리는 입을 열어 단 세 글자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쏘지마! 쏘지마!!”

하지만 우리의 소리는 너무 작았다. 수십만 명의 구호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쏘지마! 쏘지마!!”

그것은 독재와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피 맺힌 절규였다. 우리의 외침이 울음으로 바뀌어 갈 때 쯤 우리의 작은 소리는 점점 메아리를 타고 있었다. 조금씩 거세지던 외침은 끝내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종로 네거리가 “쏘지 마” “쏘지 마” 우레와 같은 절규로 물결치고 있었다.

수 십만이 외치는 함성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한 손에 빨간 카네이션을 들고 한 발씩 전투 경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피곤에 찌들어 무표정한 전경들의 가슴에 한 송이 카네이션을 달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의 고요를 타고 사랑과 용서가 담긴 카네이션 향기는 거기 있는 모두의 가슴에 전율로 와 닿았다. 전투경찰들 역시 평화의 향기에 취해 한동안 최루탄을 쏘지 못했다. 비록 시위대와 전경은 독재정권의 폭정으로 대치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우리의 형제이고 아들이며 살을 부비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의 동포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꽂아 준 카네이션을 멍하게 바라보던 전투경찰의 크고 순진한 눈망울을 기억한다.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용서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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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자서전 9] 뜻하지 않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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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의 늦은 신혼은 다시 시작됐다.
오랜만에 찾아 온 행복에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남편은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했다. 감옥에서 보낸 13년 동안의 삶 속에 남편에게 신앙은 크나 큰 삶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나는 여성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 당시 한국 여성운동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후 만들어진 기존의 보수적인 여성운동과 다른 하나는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탄생한 진보적 여성운동이다. 전자는 군사독재 정권에 협조하고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후자는 독재에 항거하여 적극적으로 민주화 투쟁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진보적 여성운동이 조직화되기를 희망했다. 난 운동과정에서 미진했던 이론적 공백을 학습하고자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창 대학원 논문을 쓰던 어느 날, 난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임신이었다. 마흔이 넘어 아이를 가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너무 감사하고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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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내 나이 마흔 한 살에 첫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난 내심 딸이기를 원했었다. 딸은 나의 평생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챙겨주고 다독거려주는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 서운함은 주변의 환호와 축하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때만 해도 아들의 탄생은 가문의 영광이자 동네의 경사였기 때문이다.

엄마가 된 나는 비로소 생명의 고귀함과 여성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뜻하지 않은 선물에 감격했다. 남편은 아이를 고난에 찬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선물로 여겨 마치 보물을 다루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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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길’로 지었다.
그런데 성이 문제였다. 지금은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지만 그 때만해도 이름에 엄마의 성을 쓰는 것은 생뚱맞고 난데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의 성에 내 성을 덧붙여 ‘박한 길’이라는 이름을 완성했다. 그러나 구습에 박힌 제도의 벽은 지금이나 그 때도 여전히 완강했다. 출생신고서의 성을 쓰는 칸에 나는 ‘박한’이라고 적어서 냈다. 동사무소가 발칵 뒤집혔다. 새로운 성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제갈’ ‘선우’ 씨도 있는데 ‘박한’이 뭐가 문제되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방법이 없다는 공허한 대답만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박 한길’로 출생신고를 마쳤다. 하지만 아들의 이름은 분명히 ‘길’이고 성은 ‘박한’이다. 아들도 자신의 이름과 성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박한 길’은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며 삶을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