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이 되는 이야기
한명숙 전 국무총리 회고 스토리1
ASHA 아샤
2009. 5. 2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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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08/03/2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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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양시이다. 그 곳에서 나고 다섯 해를 살았다. 하지만 다섯 살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고향에 대한 나의 기억을 유년으로 격리시켜 버리고 말았다. 다섯 살 코흘리개에게 무슨 고향의 추억이 아련할까마는 난 하시라도 내 고향이 평양이라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부모님이 평생토록 가슴에 저미고 살아오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전쟁이 일어나자 몇 달만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믿음으로 값나가는 집안의 전 재산을 고향땅에 묻어 둔 채 변변한 차림도 없이 월남하셨다. 그러나 그 짧은 몇 달은 평생의 한으로 남아 결국 50년이 넘는 세월을 고향을 그리다 끝내 타향에서 망향의 넋이 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분단의 한을 보고 느끼며 자라 온 내가 이후 통일과 평화운동에 참여하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백하거니와 난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까지 현실과 세상물정에 까마득하게 눈먼 청맹과니였다. 나는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는 불문학도였으며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고픈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너무도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적어도 그를 만나기전까지...
꿈만 먹고 살던 순수 몽매한 나에게 한 명의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나의 전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버렸다. 그로 인해 내 인생은 평범한 삶에서 고난에 찬 삶으로, 문학소녀에서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변해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변모시킨 키다리 아저씨. 그가 바로 내 남편 박성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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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08/03/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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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편 박성준을 만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나는 당시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 단체 ‘경제복지회’에서 마르고 껑충한 박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연합 써클의 회장이었고 나는 부회장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숨긴 채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생 연합단체였다.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점점 남편의 철학과 삶의 태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미 둘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였다.
그 꽁꽁 숨겨 놓은 감정을 은근 슬쩍 고백한 것은 남편이 아닌 나였다. 이화여대에서는 해년 마다 개교기념 축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이른 바 ‘쌍쌍파티’ 였다. 당시 이대생들은 쌍쌍파티의 파트너가 누구냐가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일 정도였다. 나는 남편 박성준에게 파트너를 신청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축제장으로 들어서는 깡마르고 좁은 그의 목에 매어진 빨간 넥타이. 남편 역시 자신을 파트너로 신청해주길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으며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4년간의 길고 짙은 연애였다.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했으며 사랑의 불꽃이 뜨거워지는 만큼이나 나는 남편을 통해 점점 사회문제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시 군사독재에 저항한다는 것은 개인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며 목숨까지 걸어야할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한 위험한 결정임에도 내가 기꺼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들 것을 결심한 것은 남편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드디어 우리는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우리의 결합은 동지와 동지의 연대였으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었다. 1967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는 서약과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그야말로 꿀과 같은 신혼생활이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채 익히기도 전에 신혼의 단꿈은 무참하게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1968년 7월. 남편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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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08/03/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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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6개월의 짧은 신혼생활의 추억만을 남겨 둔 채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이제 혼자다. 운동의 동지이자, 삶의 친구였으며 사랑하는 애인이었던 나의 님은 가고 나만 혼자 남았다. 지구상에 나 혼자만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좁아만 보였던 신혼방은 시베리아 벌판 보다 더 황량하고 추웠다. 슬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사람의 눈물이 마를 수 있다는 걸 난 그 때 알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픔에 겨워 있을 순 없었다. 난 비록 혼자지만 이제부터 두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차디 찬 감방에서 젊은 꿈을 사장 당하고 있는 나의 동지를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다.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남편이 갇혀있던 대전교도소는 일제시대에 정치범 수용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서울에서 약 세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남편이 수감되던 그 날부터 출옥하는 그 날까지 (교도소 규정에 따라) 단 한 번의 어김도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남편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 붙여오는 답장을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았다. 비록 교도소의 검열을 거쳐 서로의 생각을 온전하게 전달할 순 없었지만 남편과 나의 옥중서신은 13년 동안 서로의 이상과 사랑을 오롯하게 확인할 수 있는 창구였다.
우리의 편지는 남편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강한 끈이었다. 우리의 못 다한 사랑과 시대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희망이 온전하게 편지에 실려 있었다. 우린 편지만으로도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철학까지 공유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이었다. 그리고 점점 더 강하고 맹렬한 투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 이화여대 사감을 지내던 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다 결국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새롭게 직장을 옮긴 곳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나의 인생을 뒤 바꾼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당시 한국사회에 산재해 있던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위하여 창설되었지만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간자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그 실질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를 다섯 계층으로 나누어 집중적인 중간집단 교육을 실시했다. 나는 당시 여성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집단 여성교육 과정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교육생 보다는 나 스스로였다.
교육과정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등 가난하고 소외 받는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감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다. 그 때 만난 분들은 지식인 여성들과 더불어 한국 진보 여성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6년 동안의 교육은 실질적인 한국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무렵 어쩌면 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인지도 모른다.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으며 남편이 출옥될 가능성은 단 1%도 없었고, 서슬 퍼런 독재정권은 살벌한 감시의 눈길을 한시라도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참으로 씩씩하고 용감했다. 어머니가 사다주신 평화시장의 싸구려 티셔츠와 까만 바지를 입고서 거침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누비며 헤집고 다녔다.
나는 매사에 감사했으며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세상을 바르게 살아간다는 자부심과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정의감으로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마지막 발악은 나와 우리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한 순간에 깨트려버렸다.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 말기 결국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동지들은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Posted by 해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