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 소아미

[스크랩] 바바 자이말 싱 지와 영혼의 과학

ASHA 아샤 2017. 2. 22. 12:28

 

바바 자이말 싱 지와 영혼의 과학(1)

 

산문이든 운문이든

친필로 된 글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시대에는 속기와

녹음기가 알려지지 않았다면

과거의 한 성인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바바 자이말 싱께서

그의 사랑스런 바부 사완 싱께 보내셨던 많은 편지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고 많은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게다가 그분과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그분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있는 이야기들을 남겨두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이 영혼의 불길을 전해주었던 하주르 바바 사완 싱께서

대한 구루가 전한 메시지의 본질을

생생한 기억으로 해석해 내셨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우리는 바바 지의 가르침의 본질과 깊이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얻어낼 수 있다.

창 조


절대 실재는

그 궁극적인 상태에서는

니란카르(Nirankar),니르군(Nirgun),아나미

(Anami)즉,무형의,무속성의,무명의 였으며

부정 명제로만 표현될 수 있다.

빛도 어둠도 아닌,소리도 정적도 아닌,등으로.

그는 이해할 수 없고,형용할 수 없고,

무한하며 표현 불가능했다.

바로 이 지고의 실재가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

 

그가 스스로에 형상을 투여하자

아감(Agam),알라크(Alakh),사트 나암(Sat Naam)

등의 순수히 영적인 영역을 만들어냈으며

 빛과 소리는 그 근원적 속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강하면서

그는 물질 흐름 또는 칼(Kal)을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칼은 그 실재가

 더욱 더 낮은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우세하게 되었다.

사트 데쉬라는

순수하게 영적인 차원 아래에 생성된 끝없이 많은 영역들은

세 개의 커다란 분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브라만드,운드,그리고 핀드,원인계,

아스트랄계,물질계 라고도 하며 다른 말로는

영적-물질적,물질적-영적,

물질 영역이라고 불리운다.

 

사람이 상대계에 살아가는 동안은

마야(Maya)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의 욕망은 다른 욕망으로 이어지고

즐거움 뒤에는 고통이 따른다.지속적인

안위와 지속적인 기쁨은 어디에도 없다.
 
신께서는

 인간의 세속적인 축복의 잔을 채울 때

 행복과 만족을 남겨놓아 피조물이

조물주인 자신을 완전히 잊지 않도록 만드셨다.

지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상대성의 영역을 초월하여 영혼이 절대에 녹아들고,

전의식의 대양에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며,

모든 실패와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순수한 영적인 영역에 다다르게 되는 데에 있다.

자유의 길

어떻게 이렇게 초월할 수 있는 것인가?

바바 지께서는 카비르,나낙,소아미 지가

그랬던 것처럼

외형적인 관습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해서

언급하셨다.

경전을 읽는 일은 영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해탈을 보장할 수가 없다.

 

신비주의 문학과 종교적인 관습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즉,일상사에서 접하는 것보다

더 깊은 실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류에게 끊임없이 자각시켜준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재는

 실질적인 방법을 통해 다가가야만 하는 것이지

지적인 문제와 논쟁에 몰두하는 것은

 그저 참된 길을 향한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기키만 할 뿐이다.

   오 사람아!

전능한 이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찌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뽑내는가?
   그대의 지적인 섬세함들을 버리라. 

   -카비르

   단지 경전을 읽고 쓰는 일에

스스로를 속박함으로써 기만당하지 말라.
   스승들의 길은 다르니.

누가 진실로 그 길을 따라 그것을 얻을 것인가.
   -카비르

악마도 경전을 인용할 수 있다.

종교적인 언쟁과 말다툼,카스트(사회적 계급)와

바르나쉬람(Varnashram),그리고

숭배에 대한 자만,순례,그저 경전을 암송하는 것,

과거에 왔다가 사라진 이들을 숭배하는 일,

그와 같은 행위와 수행들은

모두 거대한 속임수이며

영혼을 상대성의 세계의 속박 내에 묶어두려는

칼(Kal)의 덫이라고

바바 지께서는 단언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라나야마와 다양한 무드라(mudras)와 아산(assan) 등의

전통적인 요가 수행 즉,외형적인 크리야도

우리를 참다운 목표에 이르게 해주지는

못한다.

 

당신의 삶이 충분히 증거하고 있듯이

바바 지께서는 성스러운 사람이라면 어떠한

신앙과 직업을 갖고 있든 상관하지 않고 매우 존중하셨다.

그러나 인간 최고의 이상을

놓치지 않으셨고 카비르가 표현했던 통찰력으로 사셨다.

  성스러운 이는 모두가 공경받기에 합당하나,
  나는 말씀에 통달한 사람만을 사모하노라.
  -카비르

바바 지께서는 어린 나이로도

많은 요가 수행법으로 실험을 해보셨으며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학문적인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셨다.

 

그분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있 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에 일말의 선입견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그저 자신이 모든 길을 걸어보았고 산트 마트,

즉 수랏 샤브드

요가의 길이 최상의 길이라는 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하셨다.

요가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신비롭고 놀라운 힘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그분의 유일한 기준은 이것이었다.

 

그러한 힘들이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게 해주고

따라서 욕망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보통의 경우 그렇지만)

 그 힘들은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다.
 
1894년 무리(Murree)에 있는 동안

그분은 바바 사완 싱께서 던진 많은 질문에 대해

답을 해주면서 비교 요가의 주제에 대해서 장문으로 답해주셨고

카비르와 나낙이 어떻게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최상의 것을 흡수해 냈는지,

어떻게 그들이 더욱 더 높이

뚫고나가 신비로운 길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구나 이를 수 있는 곳에 있는

무형의 실재에 녹아드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결론을 내려주셨다.

그분은 과거의 스승들의 이야기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요점을 강화시키곤 했는데

특히 자신의 위대한 구루(소아미 지)의

말을 인용했다.

  스승들의 길은

다른 모든 길보다 훨씬 나으니,온전히 믿을지라.
  수피주의와 베단타주의는 그대를 어떤 정도까지는 인도할 수 있으나
  궁극적인 목표까지 데려가지는 못하나니.

성인들은 지고자의 광휘 안에서 영원히 거하노라.

다른 모든 신념과 이치는 상대성의 차원을 초월할 수 없노라.
  -사르바찬

신비적 성취에 있어서

최고를 의미하는 수랏 샤브드 요가란 무엇인가?

바바 지께서는,

그것이 가장 적은 노력으로 모든 생명과 빛의 주 근원으로

되돌아가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 비밀은,

영혼은 자신이 내려오게 되었던 시점으로 돌아가려면 그 오르막 길은

내려온 길과 반드시 똑같아야만 한다는 것을 간파하는데 있다.

무명의 실재는

이름과 형태를 띄게 되었을 때

샤브드,나암,칼마,또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바로 이 영류,

즉 멜로디와 광휘라는 주 속성을 띠는 이 흐름이

모든 창조의 원인이다.

1903년 4월 21일에 보냈던 편지에서 바바 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샤브드를 통하여

만물이 현현하게 되었나니 이슈와르(세상의 지지자로서의 신),
  지바(개별적 영혼),마야(미세한 물질과 조악한 물질),브라만드(물질계,아스트랄계,

  그리고 원인계) 모두는 그 움직임으로 만들어졌노라.

모든 성현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말씀,곧 나암의 힘의 작용에 대해 증거했다. 
말씀의 드러냄을 통해 만물이 생겨났나니.그리고 또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수랏 샤브드 요가의 스승들이 이 주제에 대해 새로운 것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다른 점은,만일 만물 지바 아트만을 포함한 이 샤브드(또는 말씀)이라는 매체를 통해

현현하게 되었다면 출발점(니란카,니르군,아니미,그리고 지고의 실재)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최상의 방법은 샤브드이다 라는 개념을 얼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샤브드)의 음악과 영광은

모든 창조물에게로 퍼져나가며 우리 존재를 관통하고 있다.

말씀(샤브드)에 연결될 때에만

영혼은 무명의 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율을 이용하여

그의 문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밑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그 연결이 약해지게 되었고

자신의 참된 본성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육신과 마음이라는 조악한 베일을 입게 됨으로써 영혼은

본래의 고향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바바 지께서는 1900년 5월 15일에 썼던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바 아트만이

사츠 칸드(참된 고향)와 샤브드 둔(Shabd Dhun)에서 분리되어 나온 이후로 

줄곧 영 혼은 사트 푸루쉬(참된 존재)와

샤브드 둔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노라.

그러나 비록 지바가 알지는 못하더라도 샤브드는 항상 지바 아트만을 돌보노라.
 
  왜냐하면 지바는 마음과 마야,

그리고 그 대상들과 너무나 속기 쉬운 감각들에
  깊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영혼은 그것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것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실제로는 해로운 것을 이롭다고 여기고 있다.

마음을 향한 사랑은 영혼을 마취 시키게 되었고 

마음 그 자체는 감각의 즐거움 앞에서 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마침내 마야는

그 손아귀로부터 영혼이 결코 떠나갈 수 없도록 마법을 걸었다. 

 


바바 자이말 싱 지와 영혼의 과학 (2)

 

우리의 영적 능력은

마음과 물질(마야)의 조악한 껍질에 뒤덮여 흐려져 있다.

비록 음류(Shabd)가 우리의 내면과 주위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음악과 그 영광을 들을 수도,볼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지고한 연인을 보여 주는 그 눈은 다르다오. 
   -라그 와다나 577절.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격한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바바 지는 말했다. 

   이것은 신의 뜻이나니 
   살아 있는 사트 구루를 통하지 않고서는 
   신을 알 수 없으리라. 
   -바르 비하그라 556절

생명을 불어넣는 스승의 손길이 없다면

영혼은 잠에서 깨어나 나암의 파장에 맞춰질 수가 없다.

인간(Jiva)은 스스로 샤브드와 연결되기에는 조악한 물질계에

너무도 깊이 빠져 버렸다.게다가 내적인 길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비록 영혼이

 육체 의식을 초월하여 내적 차원에 들어간다 해도

혼자서는 그다지 많이 진보할 수 없다.

첫 번째 영적 차원인 운드와 두 번째 영적 차원인 브라만드는

거의 무한에 가깝다.

그러므로 영적인 안내자가 없다면,인간은 이러한 차원들의

놀라운 광경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게다가 신비적인 여행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는 중간 과정에 있다.

이곳은 너무도 지나가기 어려우므로 깨달은 자의

영혼을 제외한 다른 영혼들은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바바 사완 싱 지께서는 한 제자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신비적인 길에 있어

살아 있는 스승의 필요성에 대해 실로 매우 명확하게 기술하셨다.

 

내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있었을 때였다.하루는 명상을 하고 있는데 내 앞에

바바 지의 형상이 나타나셨다.바바 지,아니 그의 형상처럼 보이는 존재가

말씀하셨다.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는 고기와 술을 사용하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성스러운) 다섯 이름을 반복하자,

그 형상은 일어나더니 걸어서 나가버렸다.

나는 바바 지께서 살아 계실 때 실제로 그분을 보았으며 당장이라도

그분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속임수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과거의 스승들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가기 쉽다.하지만 성인의 눈과 이마는 흉내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학생에게는 살아 있는 교사가,환자에게는 살아 있는 의사가,아내에게는

살아 있는 남편이,대중에게는 살아 있는 지도자가 늘 필요한 것이다.단언하건대,

살아 있는 스승보다 제자를 더 많이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바바 지께서는 영적 영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 있는 스승이

필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셨다.
 
과거의 성인들은 신비로운 영역을 모두 탐험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내적 세계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고작 암시나 비유를 통해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암시나 비유들은

보통 사람들의 경험을 완전히 넘어서는 영역의 이기 때문에,

스스로 직접 경험을 해본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 할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 스승들의 진정한 메시지를 이해하는데조차 살아 있는 스승이

필요하다.바바 지는 소아미 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란트 사힙과 카비르,

다른 위대한 성인들이 남긴 글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적인 여행은 지적인 연구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고양의 문제이다.

학문을 추구하는 데도

한 권의 책이 통찰력 있는 스승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영적인 분야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바바 지에 따르면,인간(Jiva Atman)은

 마야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자기 스스로는 순수한 음류(Shabd Dhun)에 접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은총의 손길만이 영혼을 내면의 빛과 음악에 접하게 해줄 수 있으며

이러한 은총은 살아 있는 스승의 선물인 것이다. 

   라다 소아미,영혼의 주(Lord)이며 자비와 연민에 넘치는 그가 
   성인의 형상으로 지상에 내려왔노라.그리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영역으로 가는 단서를 주었으며 음류(Shabd Dhun)를 통해

   진리의 거처(Sach Khand)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도다.

과거의 성인들은 존경받기에 충분하다.

그들의 생애는 우리에게 빛나는 이정표가 되었으며

항상 성스러운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파장은

오로지 살아 있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스승들이

 당시에 행했던 임무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려면,

우리처럼 살아 있으며 길에 통달한 사람에 의해

행해져야만 한다.이전 스승들이

통달했던 그 길을 말이다.

 

실제로 그들이 남긴 기록을 세밀하게 연구해보면,

끊임없이 살아 있는 스승의

필요성이 역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 있는 적격한 스승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를 알아볼 수 있는가?
 
바바 지께서는

무수한 이리들이 양의 가죽을 쓴 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또한 모든 것이 참된 안내자를 발견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는 분별력과 조심스러움의 필요성을 몹시 강조하셨다.
 
그분이 일찍이 경험하신 바는

 이러한 위대한 영혼이 매우 진귀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드러내 주었다.대개 하나의 시대에는 한 사람이 존재했으나

때로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나낙과 까비르,마울라나 루미와 샤마즈 타브레즈,툴시 사히브와 소아미 지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위대한 영혼은 항상 지극히

드물었다.이러한 인물을 만난 이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다.

바바 지의 탐구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거 성인들의 기록은 하나의 기준으로

사용 될 수 있다.만일 어떤 사람이 참된 스승이라면,게다가 그가 지고의 신비가라면,

사람이 경전을 읽다가 만나게 되는 장애나 모순들은 그의 손길에 의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는 어느 한 단체의 문헌뿐만 아니라

모든 신비 단체의 기록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하나의 영역이 아닌,내면에 있는 모든 영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 바바 지께서는 많은 수행자들을 만나셨지만

소아미 지의 발치에 앉기 전까지는

그란트 사히브(Granth Sahib)에 담겨 있는 모든 보화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낮은 등급의 신비가들은 자신이 접할 수 있는 경험에 관한 내용만을 해석할 수 있지만,

지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바바 지께서는 네 명의 현자

(Pundits)를 만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된 성인의 또다른 특징은

그들이 지닌 놀라울 정도의 겸손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모순 중의 하나는,

스스로 성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인이 아니지만

성인들은 결코 자신이 성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낙은 자신이 성인들의 하인을 받드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소아미 지는 변함없이 겸손한 모습을 유지했다.

사람이란 자신의 주장으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알려지는 법이다.
 
나무는 그 이름이 아니라 열매로써 평가받는다.

마찬가지로 성인은 인간으로서의

완전함과 세속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사랑과 자비,가식 없는 행동,

다른 이의 복지를 위한 관심,그리고 명예에 대한 무관심으로 알아볼 수 있다.

성인은 자신의 영적인 선물을 자연의 다른 축복들과 마찬가지로

 대가 없이 나누어주며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스스로 구루로 칭하는 자 앞에 절하지 말고, 
   다른 이들의 자비를 믿는 이에게 절하라. 
   -사찬바르 1245절

인간의 차원에서

참된 성인을 다른 이들과 구별 짓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완전함이라면,

영적 차원에서는 그가 줄 수 있는 내면의 체험과 안내로써 그를 알아볼 수 있다.

바바 지께서는,비록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입문시 제자에게 직접적인 영적

체험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참된 스승을 시험하는 마지막 과정이라고 강조하셨다.

 

참된 스승은

죽음 이후에나 올 미래의 삶에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지금 여기서 그것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다.참된 스승은 영혼을

내면의 빛과 소리에 연결시켜주며 그 씨앗이 만개하여 성장하도록 양분을 공급

하는 일은 제자의 몫이다.

 

나암이라는 선물은 지고의 스승(Satguru)의 유일한 특권이며 그의 안내의 손길은

외부 세상 뿐만 아니라 내면의 차원에까지 두루 미친다.그의 사랑과 보호는 너무나

위대하여 그 어떤 세속적인 관계와도 결코 비교할 수 없다.

 

그의 빛나는 형상은 영혼이 육체를 초월한 후에도 함께 하며 영혼이 거룩한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차원에서 차원으로 인도한다.따라서 통찰력 있는 제자는 매 단계마다

스승의 은총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스승은 기적을 행할 수도 있다.신의 의지와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해진 법칙을 방해하려 하지 않는다.따라서 그는 은총을 베풀지라도

그 은총이 은밀히 작용하게 하며,아무것도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스승의

이름 안에서 행한다.참된 스승은 논쟁에 관여하지 않는다. 

   "내면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보도록 하라.”

이것이 그의 일관된 명이며

언제나 내면의 체험을 강조하고

외형적인 형식이나 격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바바 자이말 싱 지와 영혼의 과학(3)


믿음,사랑,조복(조건 없이 따르는 것)

진정한 사트구루를 찾는 일은 지고의 축복이다.

구도자가 적격한 스승을 찾는 데

아주 큰 인내력과 판별력이 필요하다면,

스승을 찾은 뒤에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믿음,사랑,그리고 완전한 조복(self-surrender)이다.

자낙(Janak) 왕은 몸과 마음과 부를 포기한 후에야 깨달음을 얻었다.

참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스승에게 받아들여지는 축복과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또한 그의 사랑과 지혜가 측량할 길 없이 무한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믿음,그의 뜻을 최고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더해져야 합니다.

자이말 싱께서는

강연회와 편지에서도 제자에게 사랑과 믿음의 필요성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1901년 5월 16일에 사완 싱께 보낸 편지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샤브드(음류)는 사트구루의 참모습이라.
   그대는 샤브드에 연결됨으로써 목적지에 도달할것이다.
   그러나 먼저 스승의 사람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

   사트구루는 모든 것을 주는 아나미-라다소아미와 하나이며
   영혼(지바,육신을 입은 영혼:역주)들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물질의 형상을 입었노라.
   그를 향한 강한 사랑과 헌신을 키워 나가고,그를 지고의 주로 여기는 이는
   누구든지 샤브드 던(천상의 음류:역주)과 접촉하게 되고 구원받을 것이니라.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쓰셨다. 

 바잔(신성한 음류를 듣는 영적 수행)을 백 년간 할지라도 다르샨(스승과의 만남)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의한 것만큼 정화되지는 않는다.

그 열망이 진실하며 사트구루에

 대한 사랑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라면 말이다.

조복(self-surrender)은

그러한 믿음과 사랑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바바 지의 편지는 끈질기게 이 논지로 귀결된다. 

   그대 안에서 길을 잃지 말라.

   이 생각이 그대 마음 안에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자리잡게 하라."육신,마음과 부,니랏(빛명상)와 수랏(소리명상), 눈,귀,코,입,손,발.
   정녕 이 세상 만물은 사트구르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사트구루의 것이라고 여기고 최선을 하도록 하라.   
   일순간이라도 이를 잊지 말고 계명으로 여기도록 하라. (1901년 5월 24일) 

   '내 것인데.'하는 생각이

결코 그대 가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브라만드의 주인이 된다 해도

그곳에 그대 몫이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나는 단지 대리인일 뿐입니다.만물이 사트구루의 것입니다." 
   스승의 명령이 항상 당신의 마음에 거하도록 하라.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을 기억하고

항상 가슴에 사트구루의 모습을 새겨 놓으라.

  (1900년  9월 7일) 

   가슴속에 있는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없애고

그것들을 스승의 발 앞에 놓도록 하라.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그의 뜻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그의 뜻이 그대 가슴에서 가장 높은 데 거하게 하라. 


   스승이 그대에게 잔디를 파라고 해도 그렇게 하라.
   왜냐하면 사트구루에게 복종하는 것은 가장 고결한(highest) 행동이기 때문이니라.
   그대 가슴을 이와 같이 변화시킬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더해질 것이니라.

 

  (1902년 9월 18일)

사완 싱께서 언젠가 사츠칸드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사트구루 앞에서 사랑과 믿음을 얻기만을 기도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셨을 때 바바 지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며

이렇게 답변하셨다.
  
   "그러한 조복(self-surrender)은 진실로 지고의 수행이니라."

그리고 이렇게 확언하셨다. 

   "스승을 그토록 사랑하는 자는 분명히 사츠칸드에 도달하며
   알라크,아감,아나미-라다소아미를 지나 경이의 차원에 녹아들 것이니라."

   (1897년 9월 11일 )

외적인 삶

진실한 안내자를 발견하여

올바른 형태의 사랑과 믿음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 구도자라면

자연히 사트구루의 의지에 삶을 맞춰가려 할 것이다.

그래서 바바 지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매우 강조하셨다.

그러나 내면의 길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날 필요는 없다고 그분은 주장하셨다.
 
영적 진보에 필요한 것은

내적인 초연함이며,자신을 스승에게 완전히 맡기는 자는

 모든 세속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일부는 가끔 세속을 떠나고자 하는

바램을 토로했으나 그분은 항상 그들 안에 있는 그러한 경향들을 경계하셨다. 

   그대는 가정과 봉사를 포기하고

오로지 바잔(신성한 음류를 듣는 영적인 수행: 역주)을
   수행하는 데만 헌신하고 싶다고 말한다.

가정이든 봉사든 부유함이든,
   그것들이 진정 그대의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하라. 
  

그것은 모두 마법사의 게임이며,이 세상은 하나의 꿈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에 매달리거나 그것을 포기하기를 걱정하는가?

   (1902년 9월 19일)

그분이 제자들 앞에서 항상 내세우셨던 이상은,

물 위에 집이 있지만 물에 젖지 않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고귀한 백조의 이상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세속적인 의무를 무시하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바바 사완 싱께서 베아스로 가서 10일 동안 머무르겠다는 편지를 보내셨을 때,

바바 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10일 휴가를 얻으면 먼저 곧장 집으로 가도록 하거라. 
 그러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정도에 데라(Dera)에 들르도록 해라. 
 거기서 일요일 사트상에 참석하고 다음날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니라.

그대는 집으로 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난 2, 3년 동안 그대가 관심을 쏟아야 할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집으로 곧장 가거라.

나는 그대가 먼저 집에 들른 후 오기를 진실로 바라노라.

한번은 사랑하는 한 제자가

 휴가를 받지 못한 채로 데라로 오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바바 지께서는 기뻐하시기는커녕

그런 일을 엄격하게 금하셨다.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않도록 하라."

그러고는 덧붙이셨다.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은 역시 라다소아미,

곧 주의 일이기도 하니라."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은

매우 엄격히 계율을 따라야 한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으로 가는 길은 좁고도 어려운 길이다.

베아스의 성인이신 바바 지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노라."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정확한 계율을 요구하셨는지는 다음 편지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공적인 의무가 끝나면

 아무에게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저녁 여섯 시에서 여덟 시 사이에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앉아 바잔을

   수행해야 하노라.그것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혹은 15분이든 한 시간 반이 되든 

   내면의 차원에 의식을 집중해야 하노라.

그리고 여덟 시에서 열 시까지 사트상을 하라. 


   그러고 난 후에 원하는 데로 가서 잠을 자거나 말을 해도 되느니라.
   그리고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다섯 시 반까지 바잔을 수행하라.
   그러고 나서 온종일 공식적인 일상의 의무를 다하고 만약 원한다면,
   그 시간 동안은 말을 해도 되느니라.

 

   그러나 업무가 끝나면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거나
   비입문자와 어울리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느니라.식사는 따로 하도록 하라.
   그대 주방에서 비입문자들이 요리를 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라. 
  

 특히 술과 고기를 먹는 자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니라.
   비입문자들과 어울려 다니면

 그 영향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1902년 10월 17일)
 
영적인 길을 내딛는 첫 번째 조건은

채식이 아닌,음식과 술이나 마약을 끊는 것이다.

바바 지께서는 정직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강조하셨다.

위에서 인용했던 같은 편지에

그분은 이렇게 쓰셨다. 

   누군가가 대가 없이 무엇을 준다면 결코 그것을 받지 말라.
   만일 그것을 받는다면 어떻게 갚으려 하는가?
   이 법칙을 엄격히 지키지 않는다면

그대는 최고의 영성을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니라.

우리는 세상에 이끌려 다니지 말고

 분별력을 가지고 각각의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온 세상은 부모와 자식과 부인,

그리고 세속적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의 
   사랑이라는 밧줄로 묶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노예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정글로 도망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그것은 내적인 초연함이어야 하며,

그 내적인 초연함은 오직 참스승의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사트상의 힘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오직 스승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삶의 참된 가치를

흡수하고 마야의 환상을 알게 되며

세속적인 사랑을 대체하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의 제자에게서는 축복과 평화가 발산되며

그의 자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의 긴장과 야망과 질투에서 해방된다.

그는 모든 피조물을 자신과 같은

본질을 지닌 존재로 여기며,

모든 세속에서 얻는 이득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사람만이 마야의 그물을 뚫고 지나 세상 너머에 도달할 수 있다.

바바 자이말 싱 지와 영혼의 과학 (4)

 

내면의 삶

외적인 행동의 완벽함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단지 내적인 목적에 이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방법일 뿐이다.

사트구루를 향한 사랑과 믿음,조복,그리고 도덕적인

과실이 없는 삶은 모두 여기에 중심을 둔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절대실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를 성취하지 못했다면

나머지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실질적인 영혼의 고양에 대한 문제는

바바 지께서 스승으로서 가장 관심을 가지셨던 부분이다.

그는 이론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셨다.

“왜 논쟁하는가?”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어찌하여(왜) 논쟁하는가?”
"내면으로 돌아서서,내면으로 들어가 직접 보도록 하라.“

그분이 바바 사완 싱 지와 주고받았던 편지는

 외부세상을 떠나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하나의 긴 훈계이며 각각의 편지는

 영성의 실질적인 수행에 대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혼이 마음과 감각에 의해

마야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이래로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영혼을 마음과 감각들로부터 철수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선조(과거의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바바 지께서 내려주신 두 가지 수행법은 심란과 바쟌이다.

심란은 통치자(신)들의 성스러운

이름을 반복하는 것으로 하루 종일 수행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강조하셨다.

   “항상 심란을 마음속에 새겨두라.

이동할 때에나 업무가 바쁠 때에도 그리하라.”

지고의 실재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과 욕망을 막아주는 커다란 방패가 된다.

심란은 일상적인 사념에서 마음이 자유로워 지도록 도움을 주며,

명상시에 완전히 집중을 하면서 심란을 수행하면

양미간 사이에 있는 영혼의 중심에 의식의 흐름을

신속히 모아준다.
 
일단 그렇게 집중(디얀,Dhyan)하게 되면

우리는 음류(Sound Current)에 접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심란으로 시작하여 집중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바쟌(Bhajan),즉 신성한 음류

(샤브드 던, Shabd Dhun)에 몰입하게된다.

   그대가 바쟌(신성한 음류에의 몰입)이나 심란을 수행할 때,
   마음에 어떠한 세속적인 근심을 하거나 다른 생각으로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하라. 
  

 먼저 심란을 15분간 수행하고 점차로 신성한 음류(샤브드 던)에 의식을 고정하라.
   그리고 심란을 멈추고 마음과 영혼을 음류(샤브드)에 고정하라.그리하면

   커다란 지복을 느낄 것이며 지고의 은총이 지고의 차원에서 그대에게 내려오리라.

이러한 것이 보편적인 방식이었다.물론 세부사항을 조절할 수는 있다.

수행 시간은 바뀔 수 있지만 그날 그날의 수행은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나가야 한다. 

 커다란 사랑과 헌신으로 매일 그대 가슴에서 울려퍼지는 신성한 음류(샤브드 던)에

 귀기울이라.15분이나 10분 또는 5분,혹은 한 시간이나 두 시간,그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하라.그러나 잠시라도 매일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샤브드(음류) 안에는 대단한 아름다움이 있다.

샤브드는 인간이 만든 모든 음악을 초월하며

그 음악은 영혼을 끌어당긴다.

샤브드는 그의 거룩한 고향으로 영혼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

 

샤브드는 비록 일반인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사트구루(참스승,권능을 가진 완전한 스승)의

은총과 수행을 통해 내면의 청각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 멜로디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고 주의력이 흩어져 있어서 흐릿하고

희미하게 들리지만

마음이 한 점에 집중하게 되면서 더더욱 강하게 들리게 된다.

구도자의 진정한 닻은 바로 샤브드이다.

그것은 만물을 창조해낸 의식 있는 힘이며

또한 인간의 참스승(샤브드 구루)이다.

인간의 형상을 지닌 참스승은 샤브드의

물리적인 현현이기 때문이다.

바바 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샤브드 던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형상이니라.

육체는 그저 옷에 불과하노라.
   누구도 영원히 이를 보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라.
   신실한 자들아,믿으라.처음도 끝도 없는,

참스승의 샤브드 형상은 육신 안에 거함을.

일단 이 내면의 음악과 계속 연결되면

그것은 세상의 고난과 슬픔에 대한 방패의 역할을 한다.

불운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과거의 업은 대가가 치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샤브드 던에 뿌리를 내린 사람에게는

 그 따가운 일침이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바바 지께서는 주로 단순한 시골 사람들에게 강연을 베풀었고

그들의 삶에 근거한 예와

직유를 통해 가르침을 전하셨다.

그래서 샤브드가 베푸는 보호의 권능에 대해 설명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했다. 

   육신은 마을이나 도시와 같으며 음류(샤브드 던)는 우리 자신의 집과 같으니라.
   다른 이의 집에 초상이 나거나 누군가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매우 불행할 것이니라.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집에서 매우 만족할 것이니라.

내면의 음악이 지닌 자력과 흡인력에 대해 명백히 설명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신 적도 있다. 

   샤브드 던은 마치 염소나 소와 같은 동물들을 밧줄에 묶어두듯이
   마음을 끌어당겨 똑같이 묶어두느니라.

구도자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마음과 감각(오감)이다.

바로 마음과 감각이라는 도구들에 의해 영혼은

마야의 그물에 붙잡힌 채로 지내왔으며 따라서 영혼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에서 분리되어야만 한다.

 

감각의 체험을 차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감각의 문들이 닫힌 후에도

마음은 계속해서 인간을 휘저으며 미혹시킨다.

마음은 에고의 법칙의 뿌리이며,

따라서 그것은 영혼이 조물주(Universal Lord)로부터

격리되어 버린 주원인이다.

 

이 쉬지 않는 용을 정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바 지께서는,

최고의 처방은 참스승의 형상을 명상하고

소리명상(샤브드)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지 물었다.
   마음은 오직 샤브드를 통해서만 붙잡을 수 있느니라. 
  

 매일 그 음류를 들으며 참스승의 형상을 명상하라.

그리하면 마음은 방황을 멈출 것이니라. 
  

그리고 어느 날 영혼은 샤브드 던에 의지하여 우주심의 고향이자
   세 번째 영적 차원

(다스완 드와르,Daswan Dwar : 초원인계로서 영혼이 모든 업의 법칙을 

   벗어나는 단계)이를 것이니라. 


   그때 영혼은 마음의 껍질을 뒤로 남겨두고 순수한 샤브드와 결합되며
   참스승의 은총으로 참된 고향(사츠 칸드,Sach Khand : 다섯 번째 영적인 차원으로서 

   절대 진리의 영역이다.

 

이곳에 이른 영혼은 다시는 낮은 차원으로 윤회하지 않으며 

   신과 합일될 때까지 위로 계속해서 올라간다)이르게 되느니라.

의심하지 말지니,

   영혼은 그곳에 도달하리라.(1901년 1월 7일)

일단 마음이 통제되면 마음은

 더 이상 의심하지도 않으며 흔들리지도 않게 된다. 

   그리하면 스승의 빛나는 영체가 내면에서 나타나느니라.
   영체는 물질적인 형상과 차이가 없나니.그것은 마치 깨끗한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도다.그러나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비출 수 없노라.

마음은 진정 거울이다.

세속적인 집착이라는 퇴비로 더렵혀지면 모든 것을 흐리게 하고

가려버리지만 이 막이 깨끗해지면 그 안에 우주의 모습을 비춘다.

심란을 하면서

제3의 눈(티스라 틸,Tisra Til)에

 의식(수랏)이 모이게 되면 음류(샤브드)가

지닌 자력의 도움으로 그 거울을 통과하게 된다.

수랏이 내면의 차원에 들어가면 수랏을

반기는 스승의 빛나는 영체와 만나게 되며

그때부터는 내면의 여행 매 단계마다 스승의

안내를 받는다.

영혼이 일단 내면에 있는

 스승의 빛나는 영체에 이르게 되면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끝난 셈이다.

나머지는 시간의 문제이다.

물론 영혼은 참된 스승의 힘으로 곧바로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으나 점진적으로 진보하도록 안배된다.

그렇지 않으면 고집부리던

학자의 경우와 같이 충격과 부담이 너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창고 카르마(산치트 카르마,Sanchit Karmas : 구업 또는 과거생의 행동이며

후생에서 열매를 맺는다)와 씨앗 카르마(크리야만 카르마, Kriyaman Karmas : 신업

또는 이생의 행동으로 역시 후생에 열매를 맺는다)는 스승이 제자를 품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효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현생의 기반이 되는 정업(프라라브드 카르마,Prarabd Karmas)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죽게 되기 때문이다.

스승은 이 카르마들을

가능한 빠르고 부드럽게 처리해 나가려고 한다.

바바 사완 싱 지께서 다리를 다치셨을 때

 바바 지께서는 그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과거의 업 때문이며 따라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히셨다.

그러나 그분의 고통은,비록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참된 스승의 중재로 완화되었다.

바바 지께서는 이렇게 쓰셨다.
 
   "네게 찾아온 모든 고통은 다섯 번째 부분의 것일 뿐이며

    나머지 네 부분은 이미 용서받았느니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 

   고통과 문제들은 가면을 쓴 축복이니라.

이는 그것들이 주의 명으로 오기 때문이니라.
   주는 고통이 도움을 준다면 고통을 보내며,

즐거움이 도움을 준다면 즐거움을 보내시느니라.
   즐거움과 고통은 우리의 힘을 시험하는 것이며

우리가 흔들리거나 빗나가지 않는다면
   전능한 주는 나암(또는 샤브드)으로 그러한 영혼들을 축복하시느니라. 
   (1897년 5월 8일)

바바 지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 앞에 어떠한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맞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빚은 빨리 청산될수록 좋으며

심판의 시간에 그들에게는 특별한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다. 

   병과 즐거움은 과거 행위의 결과물이니라.병든 모든 이들은 특별한 은총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침착하게 견뎌내도록 하라.고통을 받는 동안은 마음이 방황

   하지 않고 슬퍼하며 쉽게 바쟌(소리명상)으로 향하느니라.그러니 병든 시간은 복되니라.

    마음이 바쟌을 향해 있기 때문이니라. 


   구도자에게 이는 특별한 선물이라.그러므로 언제든 병과 고통이 그대를 괴롭히거든
   주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영적 수행에 헌신하도록 하라.의식(수랏)이 샤브드 던(음류)에

   몰입되어 있다면 고통은 느껴지지 않으리라.이렇게 말하지 않았더냐.즐거움은 병이요

   고통이 약이니.(1902년 10월 17일)

바바 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일단 적격한 참된 스승을 만나면 사람은 완벽한 내면의 길을 배우며
   영혼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노라.영혼의 비행을 막는 것은 오로지
   주고받음의 청산(업의 대가를 치루어 가는 과정,역주)일 뿐이니라. 


   그때의 영혼은

거룩한 음류(샤브드)를 붙잡을 만큼 충분히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모든 업의 작용에서 벗어나야만 하느니라.

참된 스승은 이 생애 동안 업의 속박

   으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해야만 하느니라.

그것은 업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다시

   태어나지 않도록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니라.”

그러므로 고통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트상기들에게는 수년간의

고통이 며칠 만에 청산된다.샤브드 던은 제자에게 보호 천사이며

주문과도 같다.우리가

그 풍요로움 안에서 위안을 구할 때 우리의 업은

 그 정화의 불길에 꾸준히 타서 없어지게 된다.

 

마음이 점차 차분해지고 업이 정리되면서

영혼은 점점 환영(마야,maya)에서 벗어나게

되며 내면의 빛나는 스승의 인도를 받아

더욱 높은 차원들로 들어가게 된다.제자는 걱정

할 것이 없다.그의 의무는 오직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스승의 뜻에 따라 일하는 것이다.

 

적합하다고 생각할 때

 그가 한 노력의 대가를 주는 것은 참된 스승의 몫이다.

참된 스승은 최고의 심판자이며,

제자들을 위해 최상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최상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주는 행하시나니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지 말라. 
  스승의 말씀에 따라 살며 계속해서 세상의 의무를 다하라.열매가 익으면,

  자신에게도 그 가지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저절로 떨어질 것이며 
  그 익은 열매는 많은 영양분을 지니게 되리라. 


 그러나 익지 않은 열매를 나무에서 잡아 떼낸다면 가지도 상하고 덜익은 열매는

 움츠러들어 별 가치가 없게 되느니라.적격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생의 열매이니라.그의 계명을 따르면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받게

 될 것이니라.매일마다 가능한 한 심란(빛명상)과 바쟌(소리명상)을 많이 수행하면

 최상의 영양이 될 터이며 샤브드와의 합일은 열매가 익어서 떨어지는 것과 같도다. 
   (1899년 3월 3일)

영혼의 진보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무르익는다는 것은 꾸준한 성장에 달려 있다.

스승의 말씀으로 부양받으며 바쟌(소리명상)으로 영양을 공급받고

 샤브드 던에 의지하여,

영혼은 차원과 차원을 초월하여

 마침내 마음과 물질의 모든 외피를 뒤에 남겨두고

사츠 칸드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영혼의 참된 거처,

곧 순수 영의 차원이다.여기서부터 영혼은 절대 실재(Divine)와

하나가 되어 점진적으로 무형의 실재(the Formless)에 녹아들어

 마침내 알라크(Alakh)와

아감(Agam)을 통과하여 아나미(Anami)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형태도 없는,

모든 움직임과 존재의 근원이다.

바바 지의 경우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과거 생에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비범하고 놀라운 속도로 전 여정을 성취하는 경우가 있다.

열정적인 헌신과 수행을 통해

 여러 생의 열매를 한 생애 동안에 맺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성을

 이상론의 한 과정으로서 좋아하거나 샤브드를

삶의 닻으로 삼지 않으면서 간헐적으로 관심을 갖는 경우에 속해 있다.

그런 이들에게 일세 해탈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샤브드의 씨앗은 스승이 한번 심어주면 소멸될 수 없다.

그리고 한 생애 동안 발아하지 못한 씨앗은

샤브드의 권능이 화현인 그 시대의 스승에게

안내를 받으면서 다음 생애에 꽃을 피우게 된다.

어떤 사람이 사망 이전에 나암의 음류에

접했고 세속적인 욕망을 모두 씻어냈다면 이런 과정 조차도 필요가 없다.

그때에는

물질계를 넘어선 차원에서부터

나머지 구원의 과정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진정한 스승이

자신의 품에 누군가를 안으면 그는 반드시 해탈하게 되며

조만간 영원한 고향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스승이 지상세계를 떠난다 해도 그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그를 안내하고 보호한다.

그에게 입문을 받은 자는

다른 누구에게 입문을 구할 필요가 없다.왜냐하면

구루의 육체적 형상이 비록 소멸하더라도

그의 샤브드 형상은 영원하고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자는

스승이 후계자로 선택한 형제에게 까다로운 부분에 대한 해명을

구할 수는 있다.그러나

내적인 안내에 관한 한 비록 스승이 물리적 육신으로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 스승의 책임으로 남겨진다.

제자의 유일한 의무는

자신의 구루가 명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뿐이며

 성공의 왕관을 얹어주는 것은 스승의 역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들을 결코 떠나거나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라.’ (마태 28:20)
 
그리고 소아미 지도 지상에서의 미션의 마지막 날에 자신의 헌신자들에게

이렇게 확언하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내가 너희들 각자와 영원히 함께 하나니.
   또한 전보다 훨씬 더 너희를 보호하고 보살피리니. 


   (지반 챠리트라 p.112 )

- 산트 키르팔 싱 - 

출처 : 내면의 신성의 불을 밝히는 시대
글쓴이 : 어울림 원글보기
메모 :